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트 1세 (문단 편집) == [[로마 왕(신성 로마 제국)|독일왕]] - 신성 로마 제국 대리 통치 == 1519년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페르디난트의 형 카를은 할아버지 영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할머니 영지인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부르고뉴 저지대 지방]], [[프랑슈콩테]] 등을 물려받았고, 할아버지의 후계자를 뽑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스페인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그러나 카를이 선거를 치루기 위해 독일에 머무는 사이 스페인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카를은 황제 선거와 대관식,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문제, 제국 회의,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 등의 잇따른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2년 동안이나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스페인의 반란은 진압되기는 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가 끝나고서야 카를 5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서둘러 돌아가게 되었는데, 카를은 자신이 스페인으로 가 있는 동안 독일에서 마찬가지로 권력 공백으로 인한 변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를 대신 맡겼다. 카를은 동생 페르디난트를 제국통치평의회 의장으로 임명하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이자, 제위의 근거인 오스트리아 대공위까지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주어 사실상 분가했다.[* 물론 이 전에도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 전하'''(Seine Hoheit Herr Erzherzog Ferdinand von Österreich)로 불렸으나 이 후 '''오스트리아 대공 전하'''(Seine Majestät der Erzherzog von Österreich)로 불리게 되어 예우상의 대공이 아닌, 국가원수로서의 대공이 되었다.] 스페인으로 돌아간 카를은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한 후 스페인을 근거지로 하여 [[이탈리아 반도]] 등지에서 프랑스, [[교황청]] 등과의 전쟁에 집중했고, 신성 로마 제국 문제는 페르디난트가 전담했다. 카를 5세는 평생 거의 스페인이나 네덜란드에 머물렀고 독일에 머문 기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수개월 이상 독일에서 머물렀던 경우는 황제 선거와 대관식, 보름스 제국회의가 있었던 1519년~1521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 차기 황제 선거, 슈말칼덴 동맹 성립 등의 사건이 있었던 1530년 전후, [[슈말칼덴 전쟁]]기인 1546년~1548년 정도였다.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신성 로마 제국 의회]]에도 카를 5세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페르디난트 1세가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회의를 주관했다. 1520년대에 걸쳐 카를 5세는 매우 긴박한 상황에 연이어 직면했다. 스페인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야 했으며, 동시에 합스부르크령 이탈리아 영토를 노리는 프랑스와 싸워야 했다. 1524년에는 독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독일 농민전쟁]]이 일어났는데, 황제는 여기에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에게 승리를 거두며 이탈리아에서 한숨돌리는가 했더니 1526년에는 갑자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왕국]]을 침공하여 개발살내면서 전운에 휩싸이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간신히 프랑스를 제압했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와 비밀리에 코냑 동맹을 맺었고, 이를 알게 된 카를 5세는 격분하여 교황을 응징하기 위한 군대를 이탈리아로 급파하여 이에 [[사코 디 로마|로마 대약탈]] 등의 사건이 벌어진 끝에 교황을 굴복시켰다. 그러는 사이 헝가리의 지배권을 두고 페르디난트가 있는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1차 빈 포위|1529년 [[오스만 제국군]]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카를 5세는 지원군만 보내줬다. 오스만과의 전쟁 와중에도 독일에서는 신교가 급속도로 확산되며 제국의 분열이 가중되고 있었다. 1529년 2차 슈파이어 제국 회의에서 황제는 [[개신교]] 인정을 철회했고, 이에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요한(1468)|요한]], [[헤센]] [[방백]] [[필리프 1세(헤센)|필리프]], [[호엔촐레른 가문|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 [[프로이센 공국]]의 설립자 [[알브레히트(프로이센)|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형.] 등을 주축으로 한 신교도측이 [[슈파이어]]에서 황제에게 항의[* 여기서 [[개신교]]의 어원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가 유래했다.]를 했지만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황제는 [[가톨릭]]의 일방적인 수용을 강요했다. 이에 분개한 신교도측은 1531년 군사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고 카를 5세가 다른 전황이 정리된 1540년대에 직접 진압에 나서 [[슈말칼덴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제 종교 개혁은 종교 전쟁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카를 5세는 종교 개혁의 확산을 저지하여 제국의 분열을 막고 아울러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서 자신을 대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다 확실한 힘을 실어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카를 5세는 조기에 차기 황제 선거를 실시하여 페르디난트를 [[로마 왕(신성 로마 제국)|독일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심했다. 카를 5세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1519년 황제 선거 당시 프랑수아 1세와 경쟁하면서 제위 세습을 포기한다고 공약했고, 1520년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루면서도 재차 공약 준수를 선언했는데 이것 때문에 페르디난트를 바로 후계자로 지명하기에 명분이 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가 1526년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게다가 1526년부터 지속된 지속된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에서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1529년 [[1차 빈 포위]]를 방어내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기독교 세계를 수호한 공을 세웠다. 이를 바탕으로 1531년 1월 차기 황제 선거를 실시되었고 페르디난트가 단독 출마로 당선되면서 [[로마 왕(신성 로마 제국)|독일왕]](로마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대관식 이전 로마왕(독일왕)으로 불렸는데 차기 주자라는 뜻이 있고 독일왕으로 [[군주]]라는 직위 뜻도 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미 1521년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물려받으면서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쭉 독일을 다스려 왔는데다가, 1531년에 독일왕으로 선출되어 사실상 독일의 군주로 봐도 무리가 없었다. 형 카를 5세는 10년, 15년씩 독일 자리를 비웠고 1552년 이후에는 독일에 온 적도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